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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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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가톨릭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928년 마드리드에서 평신도 단체인 오푸스 데이를 창설했다. 오푸스 데이는 일상생활을 통해 성화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강조하며, 스페인 내전 중에는 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부르고스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후 로마로 이주하여 오푸스 데이의 국제적 확장을 이끌었고, 1975년 사망했다. 1992년 복자, 2002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나, 시성 과정의 신속성, 증언 채택의 편향성, 기적 심사의 객관성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에스크리바는 오푸스 데이와 프랑코 정권과의 연관성, 엘리트주의적 성향 등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가톨릭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일대기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1월 9일 스페인 발바스트로에서 태어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132] 1915년 가족과 함께 로그로뇨로 이주한 후,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법학을 공부했다.[133] 1925년 3월 28일 사제서품을 받았고,[9] 1927년 학업을 위해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오푸스 데이를 창립했다.[13]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후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부르고스로 피신했으며, 1939년 내전 종전 후 마드리드로 돌아와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6년 로마로 이주하여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15] 바티칸의 여러 직책을 맡으며 명예 고위 성직자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15][21]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멕시코, 이베리아 반도, 중남미 등을 방문하며 오푸스 데이 활동을 이끌었다.

1975년 6월 26일 로마의 오푸스 데이 본부에서 심부전으로 선종했다(향년 73세).[18] 1992년 5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2002년 10월 6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134] 시성 과정에서는 방사선 피부염을 앓던 스페인 의사의 기적적인 치유가 인정되었다.[135]

2005년 8월 30일 그의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설치되었으며, 축성식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집전했다.[136][137]

2. 1. 유년 시절

호세마리아 마리아노 에스크리바 이 알바스는 1902년 1월 9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 우에스카 주의 작은 마을 바르바스트로에서 태어났다.[132] 그의 부모는 호세 에스크리바 이 코르잔과 마리아 데 로스 돌로레스 알바스 이 블랑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6남매 중 둘째였으며, 아들 중에서는 첫째였다.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는 상인이자 섬유 회사 동업자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자, 1915년 가족은 스페인 북부 라리오하 주의 로그로뇨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옷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9] 어린 호세마리아는 어느 겨울날 눈 위에 찍힌 맨발의 수도자 발자국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10][11] 이를 계기로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로그로뇨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사라고사의 신학교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133] 1924년 12월 20일 사라고사에서 부제로 서품되었고, 1925년 3월 28일 같은 곳에서 사제로 서품받았다.[9]

2. 2. 오푸스 데이 창설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깊이 이해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오푸스 데이(Opus Dei)를 창설했다.[13] 오푸스 데이는 라틴어로 ‘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뜻으로, 사회 모든 계층의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바꾸지 않고 세상 속에서 일상적인 일을 통해 성화(聖化)하고 사도직을 실천하며 완덕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45] 초기에는 마드리드의 빈민가와 병원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중심으로 활동했다.[45]

스페인 내전(1936-1939) 중에는 반성직주의적 성향을 보인 공화파의 박해를 피해 마드리드를 떠나야 했다.[14] 그는 안도라프랑스를 거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파의 거점이었던 부르고스로 피신했다.[14]

1939년 프랑코의 승리로 내전이 종식된 후 마드리드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했으며,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의 원장 수녀의 역사적 관할권에 대한 연구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5]

1943년 2월 14일에는 오푸스 데이와 긴밀히 연결된 성 십자가 사제회를 창설했다. 이를 통해 오푸스 데이 소속 평신도 회원들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교구 사제들 역시 자신의 교구장 주교에게 속한 상태에서 오푸스 데이의 영성과 수련 방법을 따라 성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로마로 거처를 옮겨 오푸스 데이의 국제적인 확장을 이끌었다. 교황청은 1947년과 1950년 6월 16일에 오푸스 데이를 교황청법에 따른 기관으로 공식 승인하며 그의 활동을 뒷받침했다.[45]

2. 3. 말년

1948년 로마오푸스 데이 남성 회원들의 교육 센터인 Collegium Romanum Sanctae Crucis|콜레기움 로마눔 산크타에 크루치스la(로마 성 십자가 대학)를 설립하였다. 1953년에는 여성 회원들을 위한 교육 센터인 Collegium Romanum Sanctae Mariae|콜레기움 로마눔 산크타에 마리아에la(로마 성 마리아 대학)를 설립하였다. 이 두 기관은 후에 교황청 성 십자가 대학교로 통합되었다.

1950년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황의 명예 고위 사제인 몬시뇰로 임명되었다.[15] 1955년에는 로마 교황청 라테란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15] 그는 교황청 로마 신학학술원의 명예 회원이었으며, 교황청의 두 위원회(신학교 및 대학교 성성, 교회법 해석 교황청 위원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했다.[21] 또한 스페인의 나바라 대학교와 페루의 피우라 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스페인으로 잠시 돌아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오푸스 데이의 단장으로서 토레시우다드에 오푸스 데이 본부 성당의 설계와 건축을 추진하고 감독하였다. 이곳은 에스크리바가 어린 시절 심각한 질병을 앓다가 토레시우다드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한 후 회복되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17] 성당 봉헌식은 에스크리바 사후인 1975년 7월 7일에 거행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오푸스 데이의 영적 중심지이자 주요 순례지로 남아 있다.[17]

말년에 에스크리바는 제1형 당뇨병[19]을 앓았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앓았던 간질[16][20] 증상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5년 6월 26일, 로마의 오푸스 데이 본부에서 심장마비로 향년 73세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할 당시 오푸스 데이는 약 80개국에 6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한 상태였다.[18]

3. 시성

1975년 6월 26일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가 선종한 후, 전 세계에서 그의 시복 및 시성을 요청하는 수많은 증언과 청원서가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여기에는 69명의 추기경과 전 세계 주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300여 명의 주교들이 보낸 서한도 포함되어 있었다.[60]

1981년 1월 30일, 교황청 시성성은 에스크리바의 시복 시성 심사 개시를 인가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2월 5일 이 결정을 인준했다. 이후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로마와 마드리드에서 그의 생애와 덕행, 기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인지심사절차가 진행되었다.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한 첫 번째 공식 기적 사례는 1976년 콘셉시온 보울로 루비오 수녀의 치유였다. 희귀병인 지방종을 앓던 루비오 수녀의 가족이 에스크리바에게 전구를 청하자 병이 순식간에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 사례는 1981년 2월 19일 공식 발표되었다. 1990년 4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가경자로 선포했다. 교황청 시성성 의사 위원회는 1991년 7월 6일 루비오 수녀의 치유를 기적으로 만장일치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92년 5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에스크리바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복자로 선포되었다.

시성을 위한 두 번째 기적 사례는 1992년 11월 마누엘 네바도 레이 박사의 치유와 관련된다. 그는 오랫동안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만성 방사선피부염을 앓고 있었는데,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보고가 1993년 3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에 접수되었다.[99] 시성성은 이 사례를 에스크리바의 전구를 통해 이루어진 유효한 기적이라고 판정했고, 2001년 1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기적을 공식 승인했다.

2002년 10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성 베드로 광장에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성인 시성식을 거행했다.[134] 시성 미사에는 전 세계에서 온 42명의 추기경과 470명의 주교를 비롯해 많은 가톨릭 단체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에스크리바의 시성 과정은 1983년 교회법전 개정으로 절차가 간소화된 이후 처음으로 처리된 사례 중 하나였다.

3. 1. 시성 과정 비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시성 과정은 그 신속성과 공정성에 대해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1992년 에스크리바의 복자 추대식 직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윌리엄 D. 몬탈바노는 이를 "현대 시대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복자 추대식"이라고 평가했다.[100] 비평가들은 시성 과정에 부정이 만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지지자들은 에스크리바의 시성을 위한 재판을 주재한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라파엘 페레즈 신부가 시성 관련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이라고 반박했다. 페레즈 신부는 과정이 신속했던 이유로 에스크리바 인물의 "보편적인 중요성", 탄원자들의 전문성, 그리고 1983년 교회법 개정으로 절차가 간소화된 점을 들었다.[101] 탄원 변호사 플라비오 카푸치는 바티칸에 제출된 6,000통의 탄원서가 과정의 진지함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101] 실제로 에스크리바의 시성은 1983년 교회법전에 따라 절차가 간소화된 후 처음 처리된 사례 중 하나였으며, 마더 테레사의 경우 사망 후 6년 만에 복자 추대되어 에스크리바(17년 소요)보다 더 빨랐다. 그러나 언론인 케네스 L. 우드워드에 따르면, 실비오 오디 추기경은 많은 주교들이 에스크리바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시성을 서두르는 것에 "매우 불쾌해했다"고 전했다.[61]

시성 조사의 핵심 자료인 ''포지티오''(시성 후보자의 삶과 업적에 대한 공식 문서)의 편향성 문제도 제기되었다. 우드워드는 기밀로 분류되었던 6,000페이지 분량의 ''포지티오''가 1992년 언론에 유출되었으며, 이 중 약 40%가 에스크리바의 후계자이자 오푸스 데이 수장이었던 알바로 델 포르티요와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로드리게스의 증언이라고 밝혔다. 우드워드는 이들이 에스크리바의 시성에서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들이라고 지적했다.[102] 반면, ''포지티오''에 포함된 유일한 비판적 증언은 전 오푸스 데이 회원이자 가톨릭 교회를 떠난 사회학자 알베르토 몬카다의 것으로, 단 두 페이지 분량이었으며 교회 당국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고 비판했다.[102]

또한, 에스크리바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던 다수의 전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자신들의 증언이 시성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오푸스 데이 초기 멤버였던 건축가 미겔 피삭[26][106], 에스크리바의 개인 비서였던 블라디미르 펠즈만[61][62], 로마 중앙 사무실에서 일했던 마리아 델 카르멘 타피아[107], 에스크리바의 육촌인 카를로스 알바스[108], 여성부 간부였던 마리아 안구스티아스 모레노[109][110], 아일랜드 출신 물리학자 존 로슈[111][112] 등이 포함된다. 우드워드는 에스크리바와 가까이 지냈던 6명의 증언(허영심, 비열함, 성급함, 부하에 대한 가혹함, 교황 및 교회 지도자 비판 등)이 청취되지 않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포지티오''에서 비난받았음에도 반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보도했다.[115]

에스크리바의 전구(轉求)를 통한 기적 심사의 객관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비평가들은 두 건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 사례를 입증한 의사 중 일부, 예를 들어 심장 외과 의사인 라파엘로 코르테시니 박사가 오푸스 데이 회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103] 이에 대해 바티칸은 알멘드랄레호의 시골 의사였던 마누엘 네바도 레이 박사의 만성 방사선 피부염 치유 사례가 신앙교리성 의료 자문위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매우 빠르고 완전하며 지속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로 확인되었으며, 신학 자문위원들 역시 만장일치로 이 치유를 에스크리바의 덕으로 돌렸다고 밝혔다.[104] 시성 당시 오푸스 데이 측은 에스크리바의 중재에 의한 설명 불가 의학적 은총 48건과 10만 건의 일반적 은총 보고가 수집되었다고 발표했다.[105]

시성 심사 과정 자체에 대한 내부 비판도 있었다. 우드워드의 뉴스위크 기사에 따르면, 에스크리바의 시복 심사를 주재한 성인 시성성 심판관 9명 중 루이지 데 마지스트리스와 후스토 페르난데스 알론소 2명이 절차 중단을 요청했다. 데 마지스트리스는 에스크리바의 시복이 교회에 "심각한 대중적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61] 볼로냐에서 성심 사제회가 발행하는 저널 ''Il Regno''는 1992년 익명의 심판관(정황상 데 마지스트리스로 추정)이 작성한 기밀 투표 문서를 공개했는데, 이 문서는 절차의 조급함, 비판자 증언 부재, 에스크리바와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관계 등에 대한 부적절한 처리, 에스크리바 본인의 영적 겸손 부족 가능성 등을 지적하며 절차 중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119] 특히 데 마지스트리스는 주요 증인인 알바로 델 포르티요가 에스크리바의 고해성사 고해 신부로 31년간 봉사했기 때문에 고해성사의 비밀 유지 의무에 따라 그의 증언은 절차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9]

이러한 반대 의견을 표명한 데 마지스트리스는 이후 불이익을 받았다는 관측도 있다. 그는 2001년 사도좌의 주요 직책인 내사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통상적으로 이 직책에 주어지는 추기경 직위를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받지 못했고, 2년도 안 되어 교체되어 사실상 은퇴를 강요당했다.[120][121]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겪었던 대우에 대한 일종의 위로로 해석되기도 한다.[122]

가톨릭 신학자 리처드 맥브라이언은 에스크리바의 시성을 "현대 시대에서 가장 노골적인 정치적 [시성]의 사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16] 에스크리바와 오푸스 데이에 비판적인 전 회원들은 오푸스 데이 인식 네트워크(Opus Dei Awareness Network, ODAN)[113]나 "OpusLibros"[114]와 같은 단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비판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4. 논란

에스크리바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창설한 오푸스 데이 역시 여러 비판에 직면해 왔다. 특히 스페인 내전 이후 시기 프랑코 독재 정권과의 연관성은 주요 논란거리 중 하나이다. 비판가들은 오푸스 데이가 당시 스페인의 "국가적 가톨릭주의"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프랑코 정권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카탈루냐 출신 사회학자 호안 에스트루흐는 에스크리바를 "자신의 시대의 아이"로 규정하며, 그가 프랑코 시대 스페인과 교황 비오 10세 시대 교회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에스트루흐는 에스크리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54]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는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시대의 아이''이다. 그는 특정 국가, 특정 시대, 특정 교회의 산물이다. 이들은 프랑코 장군의 스페인과 교황 비오 10세의 교회이다. 오푸스 데이가 에스크리바가 주장했듯이 "자신을 시대에 맞춰 업데이트할 필요성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면, 오푸스는 오늘날 준군사 조직, 친파시스트, 반근대주의, 전통주의 (반동적) 조직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 프랑코 정권, 몬시뇰 에스크리바 자신이 진화한 것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했기 때문이다.[54]

에스트루흐는 에스크리바의 저서 《길》 초판이 프랑코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해'(es)인 1939년에 출판되었고,[55] 프랑코 지지파 주교였던 하비에르 라우수리카의 서문이 실렸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 서문은 독자에게 "적은 잠들지 않으니 항상 경계하라"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방자이자 흠 없는 신사"가 되고 "스페인은 성인, 현자, 영웅들의 옛 위대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56] 또한 에스크리바는 1946년 프랑코의 공식 거처인 파르도 궁전에서 프랑코와 그의 가족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영성 피정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57]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비토리오 메소리와 같은 인물은 프랑코 정권과의 연관성 주장이 에스크리바와 오푸스 데이를 겨냥한 흑색 선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60] 존 앨런은 에스크리바가 정치적 편향성을 피하려 노력했으며, 공개적으로 프랑코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고 분석했다.[8] 독일 역사학자 페터 베르글라는 오히려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에스크리바를 "국제주의자", "반(反)스페인주의자", 프리메이슨으로 의심했으며, 프랑코 정권 초기에는 오푸스 데이와 에스크리바가 정권 지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58]

프랑코 정권과의 관계 외에도 에스크리바 개인의 영성과 사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스위스의 저명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1963년 발표한 글에서 에스크리바의 《길》이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에는 "부족한 영성"을 제공하며, "진보된 보이스카우트를 위한 작은 스페인어 매뉴얼" 수준이라고 평가 절하했다.[35] 발타사르는 《길》에서 묘사된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35]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 위대하고 강해야 하며, 이교의 덕, 사도적이며 나폴레옹적인 덕으로 무장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원 안에서 움직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 즉 "좋은 땅"에 있는 말씀의 묵상적 뿌리(마태오 13:8), 성인들의 기도, 위대한 창시자들의 기도, 샤를 드 푸코의 기도, 여기서 헛되이 찾을 것입니다.[35]

그는 이후 1984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를 유지했다.[36] 가톨릭 전문 저널리스트 케네스 L. 우드워드 역시 에스크리바의 저술이 독창적인 통찰력이 부족하고 종종 진부하며, 《길》은 "현저한 좁은 마음, 인간의 성에 대한 염증, 표현의 서투름"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37]

에스크리바 개인의 성품과 행적에 대한 논란도 있다. 오푸스 데이의 운영 방식과 관련하여 비밀주의와 엘리트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다만 오푸스 데이 측은 회원들의 다수가 사회경제적으로 중하층에 속한다고 반박한다[60]). 또한 에스크리바의 성격이 좋지 않았으며, 사회적 지위 상승과 세속적 사치에 대한 야망을 가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다른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사석에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증언들도 비판의 근거가 된다.

이 외에도 에스크리바가 사적인 자리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혹, 오푸스 데이 회원들이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을 포함한 우익 정치 세력과 협력했다는 비판, 그리고 에스크리바 자신이 귀족 칭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등은 그의 시성 과정 전후로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5. 가르침과 유산

에스크리바는 미사를 "그리스도교 신자의 내적 생활의 근원과 정점"으로 보았는데, 이는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사용된 표현이다.[10] 그는 미사 집전에 있어 교회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으며, 오푸스 데이 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규정을 적용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38] 그러나 전통 전례에 익숙했던 에스크리바는 변화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여, 새로운 예식 적응에 에체바리아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성반에 입맞춤하는 것과 같은 옛 관행을 그리워했지만, 자신을 위해 어떤 특권도 요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에체바리아는 에스크리바가 "교회 규범에 대한 순종의 정신에서... 새로운 예식을 통해 전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례 개혁 담당자였던 안니발레 부그니니는 에스크리바의 어려움을 알고 그가 개인적으로 옛 예식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에스크리바는 이때 복사 한 명만 동반하여 미사를 드렸다.[39][40]

1981년 오푸스 데이를 떠난 전 개인 비서 블라디미르 펠츠만 신부는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에스크리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에 당황하여 1967년 알바로 델 포르티요와 함께 오푸스 데이를 그리스 정교회로 옮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펠츠만에 따르면 에스크리바는 가톨릭 교회가 혼란에 빠졌다고 여겼고 정교회가 오푸스 데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계획은 곧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61] 그러나 에스크리바의 시성 소송을 담당했던 플라비오 카푸치 신부와 오푸스 데이 정보실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정보실은 1966년 그리스 방문이 오푸스 데이 활동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에스크리바가 방문 사실을 교황 바오로 6세와 당시 바티칸 국무원 차관이었던 안젤로 델 아쿠아에게 미리 알리고 선물로 성상까지 가져왔다고 밝혔다.[61][63]

에스크리바는 "기쁨은 십자가의 형태로 뿌리내린다", "고통은 사랑의 시금석"이라고 가르쳤으며[43], 스스로 육체적 고행을 실천하고 오푸스 데이 회원들에게도 권장했다. 특히 자기 채찍질에 열심이었는데, 일부 비판가들은 그가 벽에 피가 튈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을 채찍질했다는 증언을 들어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44] 속죄의 한 형태로서 고행을 실천하고 고통이 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은 가톨릭 교리와 실천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에 대해 'Christifideles omnes'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스페인 내전 동안 그는 반종교적 박해의 격노를 직접 경험했으며, 풍부한 기도와 속죄로 양념된 끊임없는 사제 활동에서 매일같이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여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주교들이 그에게 사제들을 위한 피정을 설교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를 통해 스페인에서 기독교적 삶의 쇄신에 크게 기여했다. 많은 수도회와 단체들도 그의 사목적 봉사를 요청했다. 동시에, 하느님은 그가 대중의 공격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는 항상 용서로 응답했으며, 비방하는 자들을 은인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의 근원이 되었고, 하느님의 종의 사도직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45]

1959년 아일랜드 캐어에서 에스크리바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에스크리바의 청동 초상화


에스크리바의 메시지와 가르침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프랑스 개신교 역사가이자 소르본 대학교 교수, 도덕정치과학 아카데미 회장인 피에르 쇼누는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의 업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21세기를 특징지을 것"이라며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23] 반면,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에스크리바의 주요 저서 《길》을 "고급 보이 스카우트를 위한 작은 스페인어 매뉴얼"이라고 평가하며 종교 단체를 유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수도사이자 영성 작가인 토마스 머튼은 에스크리바의 책이 "복음의 진정한 매개체인 단순함으로 인해 확실히 많은 선을 행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6]

오푸스 데이 비판자들은 에스크리바의 신학적, 역사적, 법학적 기여의 중요성과 독창성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6] 그러나 여러 가톨릭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그의 영향력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우고 폴레티 추기경은 1981년 에스크리바의 시복 및 시성 절차 개시 칙령에서 "1928년 오푸스 데이를 설립한 이후로 보편적 성화의 부름을 선포했기 때문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몬시뇰은 교회의 교도권의 근본적인 핵심을 구성하는 것, 즉 교회의 삶에서 매우 열매가 많은 메시지의 선구자로 만장일치로 인정받았습니다."라고 밝혔다. 주교성성 장관이었던 세바스티아노 바조 추기경은 에스크리바 사후 한 달 뒤 "오늘날에도 오푸스 데이 설립자의 삶, 업적 및 메시지가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서 전환점,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롭고 독창적인 장을 구성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평가했다. 시복 과정의 바티칸 고문은 "그는 가장 깊은 영적 근원으로부터의 인물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주교였던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은 197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오푸스 데이의 자기력은 아마도 심오한 평신도 영성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1928년 초에 에스크리바 몬시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온 교회의 유산을 회복하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 [그는] 교회의 목회 활동의 위대한 주제를 그녀의 역사의 세 번째 천년의 새벽에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124][125]

미국 신학자 윌리엄 메이에 따르면, 에스크리바 가르침의 핵심은 "성화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며, 이는 외아들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값없이 주어지고, 본질적으로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126]

에스크리바의 저서 《길》, 《고랑》(Furrow), 《대장간》(The Forge), 《그리스도는 지나가신다》(Christ Is Passing By) 등은 널리 읽히고 있으며, 평신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성화를 추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스크리바의 복자 시성식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초자연적인 직관으로 복자 호세마리아는 성화와 사도직에 대한 보편적인 부름을 지치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일상 생활의 현실에서 거룩해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수행될 때 개인적인 성화와 사도직의 수단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칙령 ''Christifideles omnes''는 "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일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도록 초대함으로써 — 이는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그들의 운명이다 —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영적인 빛의 고갈되지 않는 원천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45]

6. 저서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영성 생활과 관련된 다수의 책을 저술했으며,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주요 저서
제목원제분류비고
The Way영어묵상집
고랑Furrow영어묵상집일부 번역에서는 쟁기 또는 돌파로 표기되기도 함.
대장간The Forge영어묵상집일부 번역에서는 단련으로 표기되기도 함.
거룩한 묵주 기도Holy Rosary영어묵상집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책이 "신성한 뜻에 완전히 의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정신적 자세인 영적 어린 시절을 제시한다"고 언급했다.[46]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영어묵상집
그리스도는 지나가신다Christ is Passing By영어설교집일부 번역에서는 지식의 향기로 표기되기도 함.
하느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영어설교집일부 번역에서는 신의 벗으로 표기되기도 함.
교회를 사랑하며In Love with the Church영어알바로 델 포르티요와 공저.
몬시뇰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와의 대화Conversations with Msgr. Josemaría Escrivá영어대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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